...이번에는 달랐다. 모든 것이 돌연히 제자리를 찾아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갑자기 텅 빈 밝은 하늘에 우주적인 동요가 일자 모래 한 알 한 알, 선인장 한 줄기 한 줄기,
그리고 그들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솔개미의 깃털 한 개 한 개까지, 그리고 또, 뜨거운 공기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동작들을 개시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 검둥이와 자기, 그리고 그와, 앞으로 그가 죽일 검둥이들 하나하나가 일제히
제자리를 찾아 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이들은 마치 조화로운 춤의 한 장면과도 같이
완전한 균형의 순간을 이룩한 것이었다. 드디어 무언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가 발견된 것이다.
신병 모집 포스터, 교회의 벽화, 이미 살육된 흑인들, 이 모든 것은 폰 트로타의 명령이나
지시와도 달랐고, 봄비처럼 수많은 평면을 거쳐 그들에게 내려오는 군대 명령을 무조건
복종하는 데서 오는 기능적 만족감 및 쾌락적이며 무기력한 권태감 같은 것과도 무관했으며,
식민지 정책이며 국제적 착취행위, 군대에서의 진급 또는 축재 등과도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파괴자와 피파괴자, 그리고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그 행위와만 관계있는 일이었다.
- Thomas Pynchon, 'V.'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번역이 영 아니올시다... 고3때 - 93년이다 - 에 산 것으로,
표지에 잔뜩 때가 묻었고 책을 빌려갔던 녀석이 축축한 곳에 보관하는 바람에 책장 일부엔
곰팡이까지 슬었다)
네이버 코인이 좀 남은 걸로 '북두의 권'을 몇권 봤다. 다시 봤다고 말하기에도 뭣할 정도로 많이 본 건데...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성제 사우자와 켄시로의 대결이다. 중학교 시절, 매주 한권씩 찔끔찔끔
나오는 만화책을 보면서 사우자의 신체에 대한 미스테리는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심장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니! (실제로 그런 사람이 희귀하게도 있긴 있다 - 007 시리즈 첫편인 '닥터 노'에서 노 박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북두의 권에서의 매력은 권의 위력이 '분노'에 있다는 것이다. (뭐 뒤로 가면 사랑, 슬픔 그런 덕성이 중요해지지만)
풀파워를 내려면 평정을 잃어야 한다니. 제다이와는 정반대다.
을유문화사에서 까마득한 옛 시절 이 책의 번역본을 냈다. 절판된 책을 고3때 빌려서 읽었다. 다시 읽고 싶어서 -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는 열댓번씩 읽고 본다 - 누군가의 책을 희생시켜서 제본을 했다. 지금도 책장 어딘가에 있을 거다.
고3때 지적인 욕구가 가장 왕성했다.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으려고 했다. 토머스 핀천(중력의 무지개 원서를 그때 샀다), 저지 코진스키, 도널드 바쎌미(그땐 바셀미 작품은 원서로 읽어야 했다), 리차드 브라우티건, 커트 보네거트 등등. 회사 후배가 내 소설을 읽고 보르헤스 얘길 꺼냈는데(왜???) 보르헤스도 그때 읽었다. 그러니까 포스트 모더니즘과 관계된 책들은 다 읽으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적 허영이었다.
물론, 지금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 허영이면 어때?
지금도 지적인 욕구가 없는 건 아니다. 볼만한 책이다 싶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쓸어담으려 하니까. 책의 좋은 점 : 값이 싸다. 넥타이 하나만 해도, 목에 걸만한 게 십여만원이 넘으니. (여기서 영화 '블랙 레인'에서 찰리의 대사를 읊고 싶어진다... 그런데 뭐였더라?)
당시 내게 <제5도살장>은 딱 맞는 작품이었다. 절멸, 운명론, 허무, 냉소, 염세, 그리고 유머.
So it goes - 안정효 번역판에선 '인생은 그렇게 가는 것' 으로 나온다 - 라는 말을 술주정처럼 읊으면서.
지금은 고3때 읽은 소설들을 다시 들춰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샐먼 루슈디와 스티븐 킹이다)
십수년 전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그땐 참으로 어리고 순진했지, 그런 생각 때문이 아니라, 어째 그 작품들을 체화해버린 게 아닐까 싶은.
1977년 출간 당시 표지. 이후 잭 니콜슨이 흰자위를 드러낸 광기어린 표정을 짓는 유명한 사진이 들어간 것으로 표지가 바뀌어 재출간됐고, 2002년에 뚱한 표정의 어린애가 오버룩 호텔을 상상하는 그림으로 표지가 다시 바뀌어 나왔다.
보르헤스가 소설 속 반전에 대해 한 말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만약 그 작품에서 볼만한 것이 반전밖에 없다면 두번 다시 읽을 필요가 없을 거라는 식의.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소설과 영화는 되풀이해서 감상하는 쪽이다. 그렇게, '이블데드3'는 스무번쯤 본 것 같다. (샘 레이미 좋아한다) 히치콕 영화들도 서너번 이상씩 봤고. 초기작 등에서 빼놓고 못 본 것도 있지만. (북북서, 그리고 이창 좋아한다) 그밖에... 팀 버튼의 배트맨1편도 그렇고...(조커와 배트맨이 서로 '네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식의 대사를 주고받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좋아한다)
스포일러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쪽이다. 결말을 알고 보면 재미없다면, 결말을 모르고 봐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기에.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것저것 정보를 알고서 보는 편이다. 선입견 없이 감상한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우리 머리속은 선입견을 쑤셔넣어 볼썽 사납게 부푼 지갑 같은 상태니까.
스티븐 킹은 반전의 키워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샤이닝의 경우는 REDRUM이라는 단어일테다. 최신작 듀마 키에서는 '테이블이 새고 있다' 라는 말이다. 반전의 순간은, 오로지 그 때를 위해 모든 것을 충전해 놓은 듯 인물과 사건이 한점에 응축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지금껏 지나쳐왔던 소소한 실마리들을 찾아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킹의 세계에서 선과 악은 뚜렷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악의 매체다. 가장 허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조금씩 틈을 벌여 마침내 이성의 벽을 무너뜨리고, 한걸음 더, 바깥으로 나가게 만드는. 그런 모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가가 바로 킹이다.
영화는 요즘 봐도 촌스럽지 않지만 포스터는 어쩔 수 없이 80년대 티를 낸다. 알록달록하다.
여튼 케이블TV 덕분에, 좋아하는 영화이긴 하지만 몇번이나 본 건지 셀 수가 없다. 어제는 OCN에선가 저 영화를 방영해주길래 TV에 취침예약을 해 놓고 눈을 감았는데, 소리만 듣고도 화면에 어떤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지를 알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대사는 외계인의 본얼굴을 본 뒤 슈워제네거가 내뱉는, "You're an UGLY MOTHERFUCKER." 인가. 번역을 개판으로 하는, 머슬 앤 피트니스지의 한국판인 '건강과 근육'에서는 칼 웨더스가 슈워제네거 에게 하는 냉소적 대사인 "You're expendable asset"을 "자네는 소중한 자산" 어쩌구로 번역해서 기가 막히지도 않았던 적이 있다.
겉도는 얘기만 써놓고 있군.
영화에서 게릴라 부대 섬멸 작전(더치 소령의 용병팀은 '장관과 보좌관' 구출 작전으로 속아서 간다)은 하루 짜리다. 영화도 그만큼 빠르게 전개된다. 특히 프레데터와 더치 소령의 육박전(이라기보단 더치가 일방적으로 얻어 터지는 거였지만)에서 프레데터의 시점으로 더치 소령이 도망치는 모습을 잡는 건 탁월한 발상이었다.
요즘 할리우드 액션영화는 갈수록 때려부수는 스케일을 높이는 게 거의 전부인 거 같다. 트루라이즈에 해리어 기가 나온 이래로 전투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ex) Mi3, 다이하드 4.0 그래서 자동차 추격신 가지고는 액션 영화라고 명함도 내밀기 힘들게 된 거 같다.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빼고는. (케이블TV에서 제이슨 본 시리즈 1,2편을 봤는데 올드 스쿨 스타일 액션영화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 동구나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현실적인' 액션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때려부수기만 하는 장면의 연속은 포르노만큼이나 지루하다. (물론 모든 포르노가 다 지루한 건 아니다) 파라마운트 회장 테드 섬너스톤이 톰 크루즈와 결별키로 하면서, Mi3의 기대 이하의 흥행을 크루즈 탓에 돌렸다는데 내가 보기엔 영화는 웰 메이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크루즈가 연기한 이안 헌트의 팀이 악역을 호송중에 교량에서 전투기와 헬기의 습격을 받을 때에는, 크루즈와 그의 부하들이 교량의 민간인을 피신시키는데 발벗고 나서는 '선역 영웅' 역할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존 맥클레인이 저러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안 헌트는 첩보원 아닌가? 역할의 정체성이 모호하면 영화의 긴장도 떨어진다... 사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이안 헌트의 정체성은 아내를 구해야 하는 남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화에 긴장이 생기려면 적어도 첩보원의 임무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 사이의 갈등이 2편에서처럼 첨예하게 대립해야 하는데, 3편은 그냥 1편과 2편을 조합한 듯한 곡예 액션을 보여줄 뿐이다. )
프레데터 1편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역시 영화 후반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체에게 쫓겼던 더치 소령이 프레데터가 적외선으로 사물을 지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두 인물의 위치는 역전된다. 쫓기는 자가 쫓는 자가 되었다가 다시 쫓기는 자가 되면서 상황은 수시로 바뀐다. 감독의 연출 능력이라는 건 이런 데서 빛나는 거 같다.
상처를 후벼파고 싶을 때가 있다. 피부의 표층 아래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넣어 안에 있는 고통과 고뇌를 모조리 파내고 싶은. 자해는 껍데기가 되고픈 욕망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침에 젖어 쭈글쭈글해진 엄지손가락처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게끔 하려는.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 중 첫번째 작품인 <블랙 달리아>는 상처를 후벼파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영화로 더 잘 알려진 <LA컨피덴셜>과 마찬가지로 실화를 소재로 엘로이 나름의 허구적인 추리를 펴고 있다.
1947년 1월 15일, 할리우드 시내의 빈터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머리카락으로 선정적인 헐리우드 언론은 그녀에게 '블랙 달리아'라는 별명을 붙여 다룬다. (어쩌면 언론의 기능이란,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인물과 사건을 '지칭'하는 단어를 창조하는 - 다르게 말해 '소설'을 쓰는 - 것일지도 모른다)
블랙 달리아는 살해 사건의 객체이자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체다. 등장 인물들의 욕망은 달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화하고 재편된다. 등장 인물들은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그보다 덜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를 속이고 또 속인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양심에 저촉되지도 않는다. 때로는 자신에게 자신이 속는다. 결국 남는 진실은,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